제목 자체부터가 왠지 불편한 감정을 올라오게 합니다. 그러나 흔하게 겪는 사람관계에서의 상처가 아닐까합니다. 필자 또한 그 속에 포함되어 있으닌까요. ‘이런 사람을 만만하게 본다. 그 이유는 뭘까’ 참으로 많은 시간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의 각각의 대인관계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하였고, 연구 논문 자료나 인문학, 심리학 관련 책 등에서도 드러납니다. 단지 표현하는 언어의 차이가 있을 뿐, 그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만하게 본다’ (1) 진짜 착하고 순수한 사람 (2) 착한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 (3) 학업, 경제
‘나는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는가?’ 물음에 답을 먼저 제시하면 어린 시절의 두려움, 불안전 애착, 자기감 통합의 부족, 자신의 결핍, 취약함, 열등감, 낮은 자존감 등에 의해 힘들어 합니다.그리고 양가감정의 심할 경우에도 그러합니다. 양가감정은 동일한 대상에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가진다는 뜻입니다. 한편, 이 질문 자체에 반론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주는 경우에도 ‘나의 잘못입니까?’라고 반문을 합니다. 이런 경우와 자연재해인 경우는 다른 관점이기 때문에 이 내용에서는 다루지 않습니다.동창생 모임이
우리는 서로 대화 중에 ‘상처’라는 단어를 흔하게 사용합니다. 상처는 왜 받을까요? 라는 질문에 많은 전문가들은 ‘나의 중심성’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하게 됩니다. 자신의 사고가 긍정왜곡이 많은지 부정왜곡이 많은지 또한 공평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상처의 크기는 똑같은 상황일지라도 차이를 나타내게 됩니다.우리들의 내면에는 어떠한 상황과 무관하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불안과 두려움, 죄책감, 분노, 열등감, 수치심, 인
조철현 감독의 영화 〈나랏말싸미〉에서의 극 중 대사이다. ‘복숭아씨가 몇 개인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그 씨 속에 복숭아가 몇 개인지는 누가 알겠느냐’란 대사를 듣는 순간 ‘아!’ 감탄의 소리가 절로 나왔다. 표현의 적절함이 그 어떤 말보다도 의미의 깊이가 크게 느껴지는 색다른 경험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정해놓은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 온 삶이었는가? 아니면 자신 안의 무한한 창조성의 열어 두고 수용하며 포용하는 자세로 삶을 살아왔는가? 또한 관계 속에서 선입견과 편견으로 다른 사람을 아프게는 하지 않았는가? 어쩌
밤새 환청이 들린다. ‘넌 인생 낙오자야, 실패자야, 인간관계에서도 완전 패배자야. 살아서 뭐할래’ 평소에 이명(耳鳴)이 있어서 파도소리는 간간이 들리지만, 이렇게 자신을 향한 무차별한 말은 너무 자신에게 가혹했다. 죽어야 될 것 같은 밤을 꼬박 뜬 눈을 새어보는 일은 손가락을 뽑을 정도다. 어설프게 아는 것이 병(病)이라고…… 망상, 우울증, 강박, 공황 등 아는 단어들을 별을 헤아리듯 세어본다. 무서움과 두려움에 누군가를 찾으려 했지만, ‘이 새벽에 다른 사람한테 민폐야’ 그 생각이 먼저 자신을 제압했다.자신을 더 괴롭게 했던
나는 정말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일까? 많은 질문을 받았다. 기질에 따른 예민함과 환경적 요소에 따라 예민함은 서로 다른 차이를 가져온다. 기질에 따른 예민함은 자신도 모르는 채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거나 행동의 조급함과 결단의 성급함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나 환경에 의한 예민함은 특정부분에 대해서만 예민하게 반응한다. 중요한 사실은 기절적인 요소나 환경적인 요소를 막론하고 자신이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의 사고에 따른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자신의 예민함은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을 찾게 되면 조절이 가능하다. 기질적인 요인은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가난은 가난을 벗어날 수 없구나’ 라고 인지할 수 밖에 없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가난의 표현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혐오감마저 들게 하였다. 이 영화에서 보여준 특별한 것은 가족애였다. 가난 속에서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사랑을 표현하고 그 사랑을 믿으며 살아간다.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욕심을 채우는 그런 구조가 아니다. 그런 모습에서 ‘가난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였다.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돈의 형태에 따라
인간관계는 언제 깨질까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나만 옳다’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깨집니다. 가뭄에 쫙쫙 갈라진 땅처럼 동시다발성으로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유리를 바닥에 떨어트렸을 때의 깨짐과 같습니다. ‘나만 옳다’라고 주장하는 내용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두 번째,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을 때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사람의 기질과 성향에 따라서 교묘하게 말을 포장하기도 하고, 약한 척하며 타인의 동정을 받으면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도 있고, 대놓고 자신의 성향을 들어내는 사람도
‘당신은 누구를 신뢰합니까? 신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란 질문에 ‘하나님, 예수님, 창조주, 부모, 친구, 저는 저를 믿습니다’ 등 다양하게 말을 합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종교를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신뢰’가 무엇일까요? ‘신뢰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참으로 슬프게도 저는 ‘신뢰’의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신뢰’가 있다고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고 믿었으니까요. 절박한 상황에서 ‘너는 누구를 신뢰하니?’라는 질문에 어안이 벙벙하면서 아찔했던 순간이 지금도 소름끼치게 부끄러움으로 다가옵니다.
아픔이 없는 사람은 없다. 아픔은 관계 속에서 시작되며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할 대상이 없을 때, 위로해 줄 사람이 없을 때 아파도 더 아파할 수가 없게 된다. 스스로 아픔을 억압하거나 아픔을 느끼지 않도록 감각을 둔화시킨다. 오랜 시간 감각을 둔화시켰다면 아파할 대목에서 오히려 더 아무렇지 않는 듯 자기를 방어, 보호하게 된다. 우리의 감정은 태어날 때부터 엄마로부터 생겨나며 관계 속에서 구체화된다. 관계 속에서 아픔을 자주 경험한 사람들은 사람을 기피하게 된다. 이런 경우 흔히 ‘대인기피, 대인공포’ 라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라고 이해해도 좋습니다. 모난 돌이 정을 맞아 모난 부분이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사회적 관계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부딪힘은 깨져가면서 터득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프다, 아프다’ 소리가 납니다. 우리는 태어난 장소가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릅니다. 문화적인 요소, 사회적인 요소, 개인적인 요소 등에 따라 형성된 성격, 인품이 있다. 한 가정 안에서도 서로 다른 인격체가 나옵니다. 자신이 경험한 바에 따라서 신념, 사고방식, 생활 양식의 차이는 전혀 다른 형태로 나
살면서 고난은 어김없이 다가옵니다. 어쩌면 고난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한 때는 ‘고난이 축복’임을 가슴에 새기며 살았던 날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마다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는 게 이제는 습(習)이 되었습니다.어느 날 작은 바람에도 크게 흔들리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빈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고 살았던 날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부정적 감정을 느끼면 안된다는 비합리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착하고 성실하게 양심적으로 살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삶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제일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선입견과 편견이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도 자신이 경험한대로 말을 하고 기억한다. 사실 우리가 보고 경험한 것은 전체가 아닌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체로 인식한다. 싸우는 두 사람을 바라볼 때도 좀 더 친한 사람 편에 서 있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털끝만큼의 의심도 하지 않는 채 믿어버리는 경우가 있다.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듣고자 준비가 돼 있는지를 점검해야 그 사람과의 관계가 형성된다. 그것은 ‘나 자신’이 아닌 상대방의 삶을 듣는 훈련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각기
나는 한 때 입이 마르도록 하는 말이었다. ‘나는 착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고 싶어.’ 그 말에 대한 책임으로 ‘좋은 사람’임을 강조하며 살았던 날들이 창피하고 민망해지면서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져보았다. 과연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좋은 사람’은 경우에 따라 다양하다. 그러나 뚜렷하게 보여지는 것은 ‘좋은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변함이 없을 것이다’라는 엄청난 비합리적인 신념이 나를 휘감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변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선생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아파서 기댔는데 더 아파’ 이 말이 가슴에 ‘훅’ 하고 들어왔다. 서로 멋쩍은 웃음을 웃으면서도 아픈 말이었다. 나는 무의식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을 체험하며 살고 있다. 그 표현이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흔히 말하는 ‘무의식의 불러드림’, 또 다른 표현으로는 ‘무의식이 고통도 사건도 만들어낸다.’ 라고 말하고 싶다.무의식 세계가 의식의 세계를 지배하는 힘이 강력하다는 것을 눈으로 보았고, 나 또한 집착이 심했을 때 나의 모습에서도 무의식의 무서운 세계를 보았다. 어느 날 같은 동료 선생님이 ‘자신을 착하다’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충분히 ‘관계를 위한 관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그만큼이다. 경계를 잘 지키는 인간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관계라고 한다.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가장 많이 받는 피드백 중의 하나가 ‘너처럼 인간관계를 하닌까 너만 힘든거야’... ‘경계선이 없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내가 아는 것은 솔직하지 않으면, 진실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10년이 되어도 깨지게 되어있다. 나처럼 잘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지만 묵인하고 싶어서 내 마음을 보지 않으려고 하고 지속하려고 했던 인간관계들을 생각해보면, 결국
한 어항 안에서 성질이 사나운 물고기와 조금 덜 사나운 물고기와 바닥청소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살지 않았다. 처음에는 성질이 덜 사나운 물고기와 다른 물고기를 함께 살았는데, 결국 한 마리의 물고기만 남고 다 죽었다. 다른 어항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일어났다. 그래서 결국 살아남은 두 마리의 물고기를 한 어항에 살게 했다.역시나 물고기의 세계도 강자가 지배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덩치가 큰 물고기가 다른 물고기를 계속 공격하니 다른 물고기는 여과기 뒤로 숨어 살게 되었다. 먹이를 줄 때도 먹지 못하게 공
교류심리학자 에릭 번(Eric Berne)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쓴 각본대로 살아가려 한다고 말했다. 그것을 ‘인생각본’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에 대해 계속적으로 유지되는 확고한 어떤 결정을 가지고 있으려는 것으로 6세 이전에 부모를 포함한 의미 있는 주위사람들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각본에는 금지령(injunction), 허용(permission)과 같은 부모의 양육태도에 따라 어린 시절에 자신에 대한 어떤 결단 즉 초기결단(early decision)을 내리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어떤 생활 자세를 가지도록 하는데 큰
우리는 자신 안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불안을 느끼며 산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를 싫어하나’,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무엇을 잘못 하였나’, ‘나만 외톨이 되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맞는 선택일까’, …… 자신을 괴롭히는 불안이 엄습해 온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특히 학생들은 ‘내가 자는 시간에 점수가 뒤쳐지는 것은 아닌가’, ‘삼수 한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을까’, ‘잠을 자도 되나’,…… 특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새벽 시간대일수록 불안은 더 고조되는 경우가 있다.나 혼자만이 불안을
그의 어린 시절과 삶의 일부분을 그의 언어로 담아본다. [‘네가 남자였다면 우리 집은 3남 3녀였을텐데.’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나는 말이다. 나는 전남 해남 ‘용동’이란 마을에서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우리 형제들의 생년월일은 누구하나 제대로 된 사람이 없고, 모두 출생보다 2년이 늦게 신고 되어있다. 4살 되던 해, 광주로 이사 왔으나 넉넉지 않는 살림 탓에 어머니는 막노동을 하셨고 아버지는 군대에 계셨을 때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과 함께 즐거웠던 기억보다는 바로 위의 연년생 언니와 둘이서 놀았던 기억이 많다. 다른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