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의 고통과 상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는 동일한 경험을 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고통과 상처는 자신의 것인지, 상대방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원인은 질투와 시기심에 있다. 인간의 질투와 시기심은 한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인간의 이기심은 인간의 선함을 뛰어넘는다. 인간의 종말에는 선함이 압도적이란 걸 믿고 있지만, 우리가 함께 사는 동안은 이기심이 많은 사람을 이겨낼 방법은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36계 줄행랑’이다. 정확히 第36計 주위상(走爲上)으로 달릴 주(走), 할 위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사랑과 열정, 따뜻한 정서를 배우는 반면에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기심, 배신감 같은 감정도 배운다. 그런 삶의 여정 속에서 지금의 나는 어떤 변화된 모습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 보게 된다. 특히 변화된 모습 중에서 사람을 경계하는 부분에 대해 나열해 보려 한다. 사람에 대한 경계가 없었던 사람이 사람을 경계한다는 것은 엄청난 두려움이고 자신의 인지적인 부분, 행동적인 부분, 정서적인 부분에 있어서 많은 세부적인 것들에서 부정의 것들을 생각하고 냉철하게 바라본다는 것이 쉽지마는 않았을
『올해 88세인 친정아버지의 폐암 진단을 받고 가족 모두가 모였다. 조직 검사를 실시했는데, 출혈이 심해서 결국 조직 검사의 결과가 나오지 못했다. 의사가 다시 조직 검사를 권유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치료를 하겠다는 목적이 있다면 조직검사를 하자는 거였다. 다시 조직 검사할 때는 위험부담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또 출혈이 있으면 개복수술해서 조직 검사를 실시해야 한단다. 조직 검사 때 출혈이 심할 경우에는 사망할 수도 있으니 가족들과 모여서 상의하라고 한다. 치료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조직 검사를 할 이유가 없다 라는 것이 의사
코로나19로 인한 지금의 현실은 심리적 전쟁이다. 코로나19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것은 외출자제, 기본 손 씻기, 기침을 할 때의 지켜야할 행동규칙 등이다. 우리는 구속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타인을 구속하는 것은 괜찮을지 모르나, 타인이 나를 구속하는 것이나 나 스스로 자신을 구속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만큼 자기중심적일 수 있다. 지금은 타의에 의해 구속을 해야 하는 시기이다. 심리적 구속은 똑같은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답답함과 불안, 우울을 동반한다. 일주일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삶에 주인은 나’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런 말은 많이 들었어도 어쩌면 자신과 상관없는 단어라고 잊고 살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때로는 누군가의 질문에 ‘잘 모르겠어요, 몰라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자신을 방어하는 말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잘 모르겠어요, 몰라요’라는 말 속에는 사실상 ‘저만이 생각이 있으닌까 그만 물어 보세요, 다른 사람 삶에 참견하지 말아요’라는 뜻이 담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하기 보다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함부로 물건 쓰는 것처럼 제멋대
나는 ‘나의 그것’이 나의 큰 단점이란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것을 그리 어려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좋아했다 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나는 그동안의 나의 관계 맺음이 엉터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정말 많은 아픈 경험을 하면서, 사람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면 위축되기도 하였고, 내가 스스로 모든 모임을 정리하면서 스스로 공황장애를 일으킬 정도로 폐쇄된 생활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여전히 잘 지내고 바쁘게 지낸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나를
우리는 무심결에 해왔던 습관대로 그렇게들 걸어가고 있다. 마치 ‘다람쥐체바퀴’ 도는 기분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러나 자세히 자신의 삶을 드려다 보면 우리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단지 우리가 체감으로 느끼는 강도가 낮기 때문에 늘 그대로의 삶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변화를 두려워한다. 그렇지만 변화를 원한다. 역설(逆說) 같은 표현이지만 역설 같은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느끼지 않고 살 뿐이다.도전을 두려워하지만, 나의 무의식 세계에서는 ‘도전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 ‘도전’이 목표를
청소년들에게 미래의 직업군, 이상형에 대한 질문도 하기 전에 스스로 이야기 한다. ‘저는 외모도 좀 생겨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하고, 집도 있어야 해요. 와이프 될 사람은 반드시 맞벌이해야 하는 조건이예요. 그리고 자신의 능력과 상관없이 연봉을 억 단위로 받아야 돼요.’ 전혀 현실성이 없이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는 혼자 살기에도 버거워요’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자동차의 종류, 옷이 메이커인지 아닌지, 핸드백이 명품인지 아닌지를 살피는 사람도 있다. 집안의 재산도 따져보는 사람도 있다. 프로필 사진을 찍을 때도 얼굴을
상담 현장에서 상담의 한 시간은 모든 에너지가 총동원되는 시간이다. 에너지의 총동원이란 것은 모든 신경 세포가 내담자의 모든 곳에 집중되어 있다 라는 것이다. ‘상담’이 직업이기도 하지만, 이미 상담사의 자실에서 늘 습관화 되어있고 익숙해져 있다. 그것이 내담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신뢰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담의 한 시간이 실제 3시간 정도 소요되는 시간이다. 만약 2시간 상담이었다면 적어도 4시간 이상의 시간을 소요한다. 내담자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스스로 갖는다.필자의 경우도 상담에 저녁이 끝나는 경우에는
우리의 심리는 자주 불안을 느낀다. 왜 불안할까?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은 알고 있을까?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색해야 한다. 그 간절함이 돈, 사랑, 명예, 직위 등 다양할 것이다. 그러면 ‘간절함’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자신에게 냉정하게 물어봐야 한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줄 정도의 간절함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볼 일을 다 보고나서 남은 짜투리 시간을 이용한 간절함이었는지는 자신만이 그 진실을 안다. 죽음의 고개를 넘을 만큼의 간절함이 아니라면 그것을 간절함이 아니다.심리적인 갈등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것
우리에게 분노의 감정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이 말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안의 분노를 탐색해봐야 한다. 우리는 부정의 감정을 나쁜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긍정의 감정으로만 자신을 성장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을 수용할 수가 없다. 살아가면서 긍정의 감정만으로 말하고 느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부정의 감정은 자신을 다시 살게 하는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도 없는 떠난 가족,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아픔, 미리 자
인간은 자기 안에서 경험을 통해서든, 배움을 통해서든 스스로 조금씩 진화한다. 진화한다는 것은 무조건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다. 퇴화되는 부분과 생성되는 부분이 함께 존재한다. 이처럼 우리는 완전히 좋거나 완전히 나쁘거나 하나만 존재하지 않는다. 상처 없이 성장할 수 없고, 성장에는 고통이 따르는 것과 같다.우리는 상대방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을 왜일까? 그래서 ‘설마’가 사람을 잡나보다. 설마(서울馬-의 준말)에 탄 마귀가 사람을 잡는다는 말이다. 설마가 넓은 영토에서 뛰어놀던 말
내 손에 무언가를 늘 움켜쥐고 있다면 손의 기능은 사라지고 만다. 어쩌면 조금씩 소멸되고 있는 기능을 느끼지도 못한 채 더 움켜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사람관계에서 오는 욕망이고 물질에 대한 탐욕이다. 쌀을 한 줌 움켜보라. 어떻게 되는지를 경험하라. 조금씩 빠져나간다. 그래서 더 많이 움켜쥐려고 한다. 더 많이 움켜쥐려고 할수록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분식 가게에서 단무지 코너를 보게 되면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세요’라고 써져 있다. ‘필요한 만큼 가져가세요’도 아닌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세요’ 일까를
‘너는 나 없이 못살아’, ‘너처럼 상처 많은 사람을 누가 받아 주냐’, ‘네가 떠나지 않는 이상 나는 널 떠나지 않을거야’, ‘너는 나를 놓치면 너 인생은 완전 비참해질거야’ 등으로 마치 자신이 없으면 안 되는 세상처럼 한 사람의 소중한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있다. 상대방의 약점을 마치 사랑하는 냥 군림하려한다. 상대방은 그런 말들을 들으면서 오히려 수치심과 죄책감이 올라온다. 그러면서도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 사람과 나는 진실로 안전하고 편안한 관계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관계가 맞는가? 자신의 감정을 솔
아픔을 잊으라는 것,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라는 것,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평정심을 찾으라는 등의 언어는 심리적 폭력이다. 정서적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당사자에게는 고통이다. ‘언어’라는 도구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여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언어’는 그 사람의 삶의 방식, 그 사람의 삶의 역사의 결과물일 수 있다. 자신의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하는 우리는 지지를 하고 충고를 해 준다. 특히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그러한 지지와 충고가 자기식대로의 경험임을 훨씬 잘 들어낸다.상
인간의 질투와 시기심은 한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이기심은 인간의 선함을 뛰어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종말에는 선함이 압도적이란 걸 믿고 있지만, 우리가 함께 사는 동안은 이기심이 많은 사람을 이겨낼 방법은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36계 줄행랑’입니다. 정확히 第36計 주위상(走爲上)으로 달릴 주(走), 할 위(爲,) 위 상(上으)로 전쟁에서 위험에 처했을 때 퇴각시켜 손실을 줄이는 것이 상책이라는 36계 최후의 전술입니다. 즉 사기꾼이 마음먹고 덤비면 피해 갈 수
매일같이 싸우는 부모가 싫어서 고등학교 때 집을 나온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유흥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겨우 생활을 버터야 했습니다. 21살 때 술집에서 남자를 만났습니다. ‘사랑 한다’는 말에 속아서 결혼을 했습니다. 일 년도 채 되지 않아서 남편이 외도를 하였고 모아놓은 2천 만 원을 몽땅 가지고 나가버렸습니다. 지금은 네 번째 만난 남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는 않지만 마음은 참 편하게 해주는 남편입니다. 이렇게 50대가 되어보니 엄마를 싫어했던 마음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 때 엄마는 왜 도망가지 않
‘억울함’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이 진짜 억울함일까요? 그 안의 솔직한 마음은 무엇일까요? 그 억울함이 누구에 대한 분노일까요? 정말 보고 싶은 것은 억울한 감정이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기대가 좌절되는 것과 욕망대로 되지 않음에서 오는 억울함이었습니다. 진짜 억울하냐고 자신에게 묻고 답해야 합니다. 억울함의 의미가 자신에게 어떤 뜻을 지녔을까요? 사람마다 그 언어가 의미하는 것은 다르게 저장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치’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빨간 김치’를 떠올리게 되고, 어떤 사람은 ‘물김치’를 떠올리게 됩
독자들로 하여금 피하고 싶은 사람을 어떻게 알아보는지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필자라고 사실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사실 잘 모릅니다. 특히 사람을 좋아하는 필자는 더더욱 사람 잘 못 알아봅니다. 다만, 그런 사람들을 많이 경험하고 나니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 가지 독자의 이야기를 전하면, 저 또한 그런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숙연해졌다는 말씀을 듣고 ‘맞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는 말과 함께 깊은 사색을 하게 되었습니다.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피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고 그들 때문에 시달리
우리는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삶이 그리 호락호락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더 흥미진진한 듯 합니다. 역설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이런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다, 이런 사람은 피하고 싶다’라는 각각의 유형이 있습니다. 사람과 소통하며 살기에 ‘사람간의 관계’는 빠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피하고 싶다’라고 생각해 본 적인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잘 살아오셨거나 자신 외엔 무관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만큼 사람에게 한 번 이상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