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의 만남에서 시절인연이 있음을 더 절실하게 알게 된다. 그것을 ‘유효기간’이라고 표현해본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음식, 물건들에 유통기한이 있듯이 사람과의 관계에도 그렇다. 이것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만나는 그 순간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것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에게 충실해지는 방법이다. ‘정성을 다하라’는 의미는 비위를 맞추고 자신을 속이라는 말이 아니다. 어떤 만남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는 의미로써의 ‘정성’이다.누구나 겉으로는 상냥하고 친절할 수 있
어느 날 묵상 중에 ‘아’ 하고 떠오른 생각이다. 이 세상에서 마땅하고 옳은 일은 오직 ‘감사함’이다. 또한 자비를 베푸는 행위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자비 베풂을 받는 자’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찰라’의 깨달음이니 증명할 수 없다. 인간이 불평하고 시기하고 탐욕스러운 이유는 마땅하고 당연한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낫다고 생각하거나 자신보다 더 못된 사람이 잘 사는 꼴이 배가 아프다.’ 등의 ‘못마땅하다’는
자녀 또는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힘들어요.’ 하면 바로 채워주고, 또 ‘힘들어요.’ 하면 또 바로 채워주는 이러한 보호가 과연 그 당사자들의 삶에 있어서 효과적인가? 더 간단히 말해서 좋은 영양분인가? 아니면 좋지 않는 영양분인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는 스스로 힘듦을 경험하고, 극복하는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영역의 폭은 넓어진다. 이 또한 사람마다 긍정사고와 부정사고에서의 차이는 크다.항상 열심히만 살아온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혼자 일궈내야 했던 사람에게는 그런 삶이 숨 막힌다는
‘나에게만 이라도 좋게 보이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어떤 말을 해도 너를 존중한다. 내 앞에서는 노력하는 모습처럼 이야기하고 뒤에서는 전혀 다른 행동(다른 사람에 대한 집착, 의심, 괴롭힘 등)으로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라고 솔직한 감정을 말하게 되면 ‘마치 내가 야단맞고 있나?’, ‘내가 공감 받고 있는 게 맞나?’ 라고 생각하는 것은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 피해의식, 의존성이 높은 사람이 갖는 사고 패턴이다.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정상적인 행동의 패턴(의처증, 의부증 등)이 아니면 서로를 위해서 만남을 멈춰야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문득 또 다른 깨달음이 왔다. 깨달음은 나의 부족함과 미숙함으로 민망스런 일을 당했거나 중요한 시점을 놓쳐버린 자신에 대한 한탄의 마음이 복합적으로 들어있다.‘어떠한 행동이 습관이 되면 그 행동을 마음먹지 않는 때에도 그렇게 행동을 하게 된다’라는 의미를 지녔다. 편하다고 생각하는 가족 안에서의 가족을 대하는 태도나 ‘가족’ 공동체 안에서의 책임성 부분에 대해서도 이 속담을 빗나가지 않는다. 즉 의존성이 높은 사람,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사람, 무슨 일이든 대충대충 살려고 하
‘제가 자주 욱해요.’, ‘남편이 감정이 욱해요.’, ‘부모님이 감정이 기복이 심해요.’ 등 주변에서 감정조절이 되지 않는다고 흔히들 그렇게들 말을 한다. 인간을 ‘감정의 동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다양한 감정을 지니고 있는 유일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감정 속에는 ‘욱’하는 성질도 포함되어 있다. 반대로 감사함이 충만한 사람은 ‘부모님은 늘 자상하시고 온화하신 분이었어요.’, ‘저는 매사에 감사해요.’, ‘저희 부부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감사하게 받아드려요.’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나 흔치 않다. ‘흔치 않다’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어느 정도로 연약할까? 누가 봐도 좋은 사람, 늘 배려하고 베푸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또한 어느 누구한테 기대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것은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공통표현이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도 연약함은 있었다. 자신에게 취약한 부분은 ‘부탁’ 하는 것이었다. 부탁을 했고, 상대방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충분히 들어줄 수 있다고 했다. 부탁을 한 사람의 기대였을까? 부탁의 결과물을 본 순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것을 내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사건으로 두 사람의 관계
어릴 때부터 ‘네가 힘들면 다른 사람을 도우지 않아도 되는 거야’. 그리고 ‘네가 도와주고 싶은 만큼만 도와주는 거야.’ ‘엄마는 다른 사람들보다 네가 더 소중하단다.’ 어쩔 수 없이 하는 말이 아닌 진심과 사랑의 언어로 표현하면 아이는 밖에서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되고, 집에서는 갑작스런 짜증 또한 줄어들게 된다.흔히, 아이들에게 양보를 가르치고, 미덕을 배우도록 가르칠 때가 은연 중 많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과유불급’ 일 경우는 탈이 나게 되어 있다. 자신 안의 내면의 상처로 인하여 자녀에게 착한 아이를 강요하거나, 자신도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치명적인 해를 주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똑같은 행동을 할까? 그렇지 않다. 개인마다 기질적 요인과 성격에 따른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병을 앓는 것도 체질적 요인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계속 아닌 것을 알면서도 끊어내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선택이고 무엇 때문일까? 끊어내지 못하는 사랑과 증오 사이의 갈등에서 오는 불안 때문에 그렇다. 이러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마음과 양심의 갈등에서 오는 것이 자신에겐 죄책감으로 온다. 즉 양가감정을 자주 느낀다면 불안과 죄책감의 강도는 높아진다. 이럴 경우 자신이 건강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을 만나게 되어 있다. 이 말의 의미에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 중에는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악한 마음’을 다른 의미로 표현하면 ‘위선(僞善)’이다. 생각해보면, 선(善)의 반대는 악(惡)이 아니고 위선(僞善)이다. 위선은 선을 가장해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말한다. 즉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자신을 속이는 것에는 감정, 생각, 행동, 눈빛 등 다양하다. 우리가 관계 안에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타인에 대한 감정이 섞인 언어와 말투, 눈빛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정신
‘울고 싶은데,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말하면서 흐느끼기만 한다. 한 때 우는 것을 배워보고 싶단 생각을 해 본적이 있었다. 그만큼 감정을 쓰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진짜 아프면, 진짜 억울하면, ‘진짜’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진짜 아픔이거나 과한 억울함이면 울음도 꺽꺽 거리거나 멈출 수 없을 만큼 표출된다. 지인에게 전화하며 엉엉 울면서 전화하는 것은 다반사일 경우도 생긴다. 현재 우는 것을 잊었다면 그만큼 마음의 평안함이 있다고 받아들이면 된다. 또는 자신이 감정을 쓰지 않았을 때가 편
일상의 대부분은 ‘선택’과 관련되어 있다. 그 선택은 최소한의 책임을 비롯하여 막대한 책임까지 부여된다. 그러나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게 되면 그 결과에 따라 억울함과 분노의 정도는 고조된다. 즉 자신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당신(부모, 자녀) 때문에’, ‘환경(상황) 때문에’ 등으로 처한 상황에 대한 원망을 하게 된다.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라는 말로 마치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책망 받는 느낌까지 주기도 한다.우리는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 ‘어떻게’라는 방법론
성인이 되어서도 어른이 되는 과정은 고달프고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포기한다고 해서 어른이 아닌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부모'때문에, '자식'때문에, '당신'때문에, '너'때문에, '나'때문에 우리는 아파하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다. 또한 '부모'덕분에, '자식'덕분에, '당신'덕분에, '너'덕분에, '나'덕분에 우리는 기쁘게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라도 필요하지 않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우리의 삶에서 위대한 선장은 작은 감정들이다. 우리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한 채 늘 감정에 복종한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은 감정에 복종하게 되고 이끌리게 된다 라는 것이다. 결국 그 감정은 ‘과거의 생각에서 비롯된다’ 라는 것이다. 생각과 감정은 외부로부터 들어와서 나의 머리와 마음 그리고 몸을 지배한다. 사람의 에너지 중심을 세 가지로 머리, 가슴, 배로 말할 수 있다. 머리는 생각, 가슴은 마음, 배 즉 장은 행동으로 쉽게 표현된다. 여기서 장은 본능으로 볼 수 있다. 과거, 현재, 미래로
부부의 인연이든, 가족의 인연이든,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인연이든 상관없이 인연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무엇인가 얽매인다는 것은 집착을 유발하게 된다. 생활화 되어 있는 ‘인연의 묶음’ 또한 무디어져 있는 익숙함의 일상이 되어 있다. 그런 익숙함에 속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알면서도 ‘속고 있기’를 원하는 있는 것인가? 인연은 자신의 선택이나 의도와는 무관하다. 어쩌면 상대방에 의해서, 어쩌면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인연이 끝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인연은 흘러가는 것이다. 이왕 서로 잘 지낼 수 있다
스스로 처리되지 않는 감정이 고스란히 타인의 몫이 되었을 때, 그 타인이 가족이 되거나 자녀의 양육에 치명적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감정의 대물림’이라고 한다. 감정의 대물림에서 자녀는 부모 행동을 그대로 흡수하며 배우게 된다. 이러한 것을 ‘동일시’라고 한다. 잔소리를 듣고 자란 아이는 돌아서서 누군가에게 똑같은 잔소리를 쏟아낸다. 또한 폭력을 경험한 아이는 돌아서서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즉 ‘공격자와 동일시’라는 개념이다.부모가 내면 깊숙이 감정을 억압해 놓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감정들, 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작품 ‘이방인’에서의 ‘이방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소외를 느끼는 이방인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은 감정에 솔직한 사람, 겉과 속이 같은 사람,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다. 즉 ‘다정한 무관심’이란 표현이 적절한 듯하다. ‘다정한 무관심’은 타인에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황을 파악하지 않는 채 감정을 숨기지 않으면서 변명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다정한 무관심’의 사람을 지켜보는 사람은 자신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판단하고
우리는 삶과 죽음의 실존적 존재와 의미론적 존재로 살기를 원한다. 추억의 사람을 기억하고, 현재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게 ‘나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은 반대로 ‘내가 그들을 의미 있는 존재로 기억하듯이, 그들에게도 내가 의미 있는 존재로 남고 싶다.’ 라는 의미이다. 의미는 삶의 원동력이 될 만큼 중요하다. 그 의미 또한 상당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자신 안의 긍정 마인드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부여를 스스로 하기 위해서는 아픈 추억을 새로운 추억으로 덧입히는 방법과 삶을 재해
많은 날을 살아보았고, 살아가고 있지만 단 한 번도 똑같은 하루를 맞이해 본 적은 없다. 주어진 하루가 매일 새로운 것은 우리에게 주는 엄청난 축복이다. 자연은 매일 다른 하루를 나름의 방법으로 잘 맞이하고 있다. 매일 보는 하늘도 똑같은 하늘이 없고, 구름의 모양도 늘 다르다. 나무와 꽃, 돌 사이에 작은 풀포기 하나라도 햇빛과 물과 공기를 먹은 만큼 자라고 있다. 단지 우리의 관심밖에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이다. 사실 우리의 삶도 자연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쩌면 자연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즉 우리의
우리는 착한 사람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 착한 사람으로 살아서 자신을 살게 하는 일이라면 착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조건 착한 사람으로 사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결정이다. 착한 사람으로 자신을 만들고자 했다면, 혹은 현재 착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믿고 있는 자신 안에서 이제는 나와야 한다. 착한 사람으로 살아왔던 삶은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상관없이 습관처럼 살아왔던 삶이었다. 그래서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또한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의 선택이다. 자신의 틀을 깨고 나와야 한다. 알에서 깨어나